처음으로 두 번째 만남까지 이어진 소개팅이 있었다. 결국에는 서로 다른 사람을 더 알아보자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 나는 책을 통해 사색하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그 사람은 지인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한다고 했다. 따라 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책을 읽을 친구가 없었고, 마침 우연히 인스타그램 광고로 소모임 앱이 눈에 들어왔다. 앱을 다운받아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독서 소모임에 가입했다. 여러 모임 중 왜 이 모임이었냐고 묻는다면, 모임 소개에 “철학” 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정은 다른 모임들과는 조금 특별한 과정을 거쳐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책의 내용도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당 일정은 기존 참석자들이 단체로 불참 의사를 표명하는 바람에 한 번 미뤄진 일정이었다. 다시 일정을 잡을 때에도 참여가 저조해, 방장이 선착순 쿠폰을 걸어 참여를 유도할 만큼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는 참여율을 끌어올리려는 방장의 노력을 보면서, ‘나라도 호응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신청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그 마음이 가장 큰 동기였던 것 같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마주한 흐름은 인터뷰와 중간중간 끼어드는 작가의 코멘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게는 꽤 새로운 방식이어서, 몰입이 쉽지 않았다.
또 하나의 반전이 있었다. “철학”이 들어간 제목과는 달리, 철학적인 이론이나 개념이 담긴 책은 아니었다는 것. 각자의 분야에서 단단한 정체성을 쌓아온 분들이, 삶을 통해 다져온 가치관과 생각을 ‘철학’이라는 단어로 풀어낸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왕 펼친 김에, 이번 기회에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보자 —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읽어나갔다.
처음의 낯섦을 지나고 나니 점차 문장들에 익숙해졌다. 때로는 어떤 문장에 가만히 빠져들어, 한참 여운을 끌고 가며 읽기도 했다.
이런 감상은 책을 다 덮은 뒤에 다시 정리해보자는 마음으로, 읽는 동안에는 밑줄도 북마크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그 여운을 그대로 느끼며, 페이지를 넘겨나갔다.
책을 덮은 지금, 다음 두 가지를 통해 떠올랐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돌아보려 한다.
여운을 가장 크게 남긴 문장을 꼽으라면, 틀림없이 노라노 여사의 말씀이다.
“행복하려면 크게 출세할 생각 말고 웬만큼 살라고.”
“크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뒷조사해보면 다 분노가 있어요.”
“능력도, 체력도 10프로는 남겨 둬야 해.”
이 문장들이 왜 그토록 다가왔는지, 처음에는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냥 — 느껴졌다.
지금에 와서 이유를 더듬어보면, 근 몇 년간 내가 살아온 삶을 응원해주되 따끔한 조언을 함께 건네는 문장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의 노력이 부정당한다는 감각이 남긴 분노. 그 분노는 이상하게도 잘 맞지 않는 관계를 길게 끌고 가게 만든 명확한 동기였다. 스타트업에서는 스톡옵션 계약과 함께 출세를 꿈꿨지만, 그 끝은 행복과는 꽤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 두 과정 모두에서 내게 부족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여유” 였다는 사실을, 최근의 심리 상담을 통해 알아가던 참이었다.
그 문장을 읽던 순간, 공감받는 느낌과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이라는 탄식, 그리고 감사한 마음 이 한데 뒤섞인 오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Q1. 가장 와닿는 인물의 철학은 무엇인가?
A1. 가장 와닿은 것은 노라노 여사의 철학이었다. (위 내용 참조)
Q2.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철학(혹은 방향성)은 무엇인가?
A2. 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지혜라면, 어떤 방향성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내 여유를 확보하는 기술” 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Q3.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A3. 남들이 개똥철학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철학과 품위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 여기까지 적어보고 나니, 솔직히 글이 썩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더 많은 결들이 맴돌았는데, 막상 문장으로 옮기려 하면 자꾸 흐름이 끊겼다. 체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아직 생각이 충분히 발효되지 않은 걸까. 노라노 여사의 말씀을 빌리자면, 오늘은 “10프로”조차 남지 않은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했다. 어느 정도는 의도된 부분이었다.
약간 피곤한 느낌이 있었기에, 아이스 라테 한 잔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에스프레소는 바에서 차가운 물과 함께 두 번에 나누어 마셨다. 페루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보다는 연한 것이 체감되어 꽤 아쉬웠지만, 나의 목적은 집중을 위한 도핑이었기에 카페인의 느낌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가 앉은 2층은 디즈니의 노래가 — 가물가물하지만 피아노 같은 느낌이었다 — 재창작되어 흘러나오고, 빔프로젝터로 벛꽃이 휘날리는 듯한 배경에 음악 스펙트럼이 출렁이는, 그치만 조금은 어둡다고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나는 어두운 분위기에 익숙해서 꽤 괜찮았지만, 모임원 중에는 어두워서 아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예민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환경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껴왔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할 말은 하는 분위기가 좋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조금씩은 늦게 모였지만, 충분히 여유라고 느껴질 시간 안에 와주었다. 부담을 덜 수 있었던 그 분위기도 꽤나 좋았던 것 같다.
모두가 모인 뒤에는 보여주기식 사진 — 모임장의 언어로, 책을 한데 모아 찍는 사진 — 을 찍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발제는 첫인상과 평점이었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생각하던 철학 도서와는 결이 달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 형식의 책이 생소하다는 말도 나왔다. 이를 통해 조금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 내가 그렇게까지 무지하고 뒤쳐지는 것은 아니구나.
다들 점수는 나보다 덜 후하게 줬던 것 같다. 나만큼 마음에 와닿은 문장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 조심히 추측했었고, 그다음 질문을 통해 그 명제에 대해 조금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노라노 여사의 말씀을 전했다. 그 말이 잘 전달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 모임장이 정리해주는 노트가 조금은 아쉬워서 —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느낀 감정을 정리해 입 밖으로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뿌듯했다.
모임장은 나시나카 쓰토무의 덕을 쌓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틱톡 영상을 훔치는 잔머리로 유튜브를 운영하던 사람이 수익 정지를 당한 것이 기분 좋았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는 조금의 모순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는 모임장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기에, 굳이 시간을 들여 확실히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느낄 수 있겠구나 라고 받아들였다.
JJ는 이순재 배우님의 이야기가 와닿았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직업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시절에 장인 정신을 가지고 노력하셨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한 부분은, 그 내용을 다시 상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관점과 감정보다는 사실을 나열하면서 본인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져 조금은 아쉬웠다.
JJ의 말을 시작으로 BB와 모임장이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처음 몰입이 아쉬워서 그런지 그 대화에 함께 빠져들기 쉽지 않았다. 내 스스로의 공감 능력 — JJ의 말에서 감정을 캐치해내는 능력 — 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랑한다고 느낀 내 스스로가 어떤 방어 기제를 가진 것은 아닌지, 편협한 관점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더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YS는 하형록 씨의 페이버 이론을 언급했다. 「주는 만큼 손해보지 않고 덕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받은 것 같다고 운을 뗐고, 그 부분이 다시 한번 마음에 걸렸다.
이 이론에 대해 나는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모임장은 “누구에게 주는가에 따라 되돌아오는 것이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조금은 아쉬웠다. 그때 BB가 “아무런 생각 없이 주는 것이 즐겁기에 준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모임장의 이론에 BB의 생각을 결합해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잘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 진짜로, 대화할 때는 말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다.)
BB는 정경화 님의 이야기를 했다. 고독한 연습실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고 했다.
BB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든 생각인데 — 왜 나는 고독하게 개발을 하면서도 생각이 많아지지는 않았던 걸까? 작업하는 동안 내 감정을 많이 억누르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 스스로가 나의 감정을 존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임을 더 우선순위로 두면서… 추후 조금 더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BB의 이야기는 모임장의 정리글에 간략히만 정리되어 있어서, 많은 내용이 잘 기억에 남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지금부터는 체력과 핵심 정리를 위해, 기억에 남는 것들만 추려본다. 위만큼 상세하지 않은 것은 양해를 부탁한다.
아마 이 발제부터는, 내가 미리 준비한 내용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내용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모임장, 나, BB가 이야기한 부분에서 묘하게 공통점이 느껴졌다.
모임장의 언어로 풀자면 “개똥철학”과 “진짜철학”,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반성하고 탐구하며 발전하기 위한 진짜 철학과 함께, 자기 자신에 심취하고 본인을 방어하기 위한 것들로 둘러쌓인 개똥철학이 있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작은 신기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JJ는 철학을 개인의 정책과 경향을 정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공감했지만, 모임장과 BB가 이야기할 때만큼의 깊은 공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YS는 철학이 안경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그 자리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일까, 왜 그런 비유를 했을까 궁금하긴 했으나 그 당시에는 깊게 고민해보지는 못했다.
다만 — 같은 주 금요일에 니체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니체가 제시한 철학은 말 그대로 “새로운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도 결국엔 새로운 “인지 구조”라는 시선을 제안한 것이 아닐까 —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발제에서 나는 지식의 모자람을 꽤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다른 분들은 ○○주의, ○○철학, ○○니즘 같은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런 내용을 잘 알지 못했기에 조금은 붕 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 아무 대답이나 뱉었다. 사람들이 “진짜요?” 하고 되물었을 때는 부끄러움이 크게 몰려왔다. 뭔가 잘못 이야기한 것이구나… 그때 나의 대답은 “실존주의” 였다. 발제를 시작할 때, 제미나이에게 대화 내용을 기반으로 어떤 철학이 잘 맞는지 물어보라는 모임장의 말에 시도해봤던 테스트 응답 — 그 4가지 철학 중 마지막 요소였다.
이야기하면서도 뭔가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실존주의보다는 “실용주의” 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리고 차라리 명사에 갇혀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나의 철학을 풀어서 설명해도 좋지 않았을까 —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사건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YS가 알랭 드 보통을 이야기한 것은 기억에 남는다. 많은 이론들 중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때 YS는 니체와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을 제미나이 답변으로 받았고 실제로는 니체에 더 집중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그 자리에서의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언급된 것 자체에 조금은 흥분하여 — 이전 연애에서 그의 말이 내게 영향을 준 이야기와, 그의 최신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그 인터뷰를 단체 채팅방에 공유하기까지 했다.
(후회가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게 제일 나다움을 표현했던 순간이었을지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보자면, 이번 발제에서는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어려운 단어들로 — 흡사 암호화처럼 느껴질 만큼 — 이루어졌기에, 나의 생각은 “어렵다… 더 공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자리에 갇혀 있었다.
마지막 발제였다.
YS는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는 상황에서 급히 답변을 마쳤고, 그래서 그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모임장은 우정, 승리, 노력을 꼽았다. 승리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다시 물어보고 나서야 그것이 “주도적인 결정과 후회하지 않음”에 가까운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 듣고 나니 꽤나 공감이 갔다.
JJ는 부딪히고 행동하는 삶을 이야기했고, BB는 매 순간 후회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했다. 이 발제는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였고 대화도 길게 이어가지 않아서, 나의 생각이 깊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 개똥철학이라도 내 관념과 품위를 가지고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관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진실되고 선하자” 라고 답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말하는 것만큼 신념이 단단하지 않다는 생각, 그리고 채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정리하는 지금 다시 돌아보면 — 더 나은 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보여,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JJ와 함께 걸어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나눈 이야기는 — 조금은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JJ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 상당히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JJ는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꽤나 친해질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